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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국 목사 칼럼_에덴동산 같은 가정

에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땅

에덴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그 곳에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에덴에서 이뤄진 가정은 천국의 견본주택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정의 모습 역시 천국의 견본주택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가정이 에덴과 같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에덴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을 주고받는 곳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상태로 만났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기 전 에덴에는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25절(새한글) 둘 곧 남자와 그의 아내는 벌거벗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성경이 말하는 에덴은 부끄러움이 없는 곳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성경 속 알몸의 남녀는 서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혼부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모임에서 가끔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끄러워서 아직 옷을 벗지 못한 부부가 있으신가요?”
같은 질문을 10여 년 동안 던져 보았지만,
단 한 커플도 “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아담과 하와처럼 옷을 벗고 만날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게 부부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만, 또 한 번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 내 마음을 모두 벗고 빠짐없이 배우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분 있나요?”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는 분들도 있지만,
다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최근에는 비율을 물었더니, 20%, 30%, 50%, 70% 다양했습니다.
옷을 벗는 만남은 자연스럽지만,
마음을 벗는 만남은 여전히 어색하기만 합니다.
마음을 벗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수치심 때문입니다.
수치심은 비밀을 만들어 내는 씨앗입니다.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에는
어느 가난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돈은 없었지만, 자녀가 많았습니다.
이미 자녀가 많았음데도 부부는 또 한 번 임신합니다.
부부는 출산 후 많은 자녀를 돌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손을 좀 덜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아이 한 명을 방학기간 친척 집에 맡깁니다.
그래서 소설 제목이 <맡겨진 소녀>입니다.
소녀는 맡겨진 집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어른들을 만납니다.
거기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섬김을 받습니다.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나랑 우물에 가보자.” 아주머니가 말한다. “지금요?” “지금은 안 되니?” 이 말을 하는 아주머니의 말투 때문에 왠지 우리가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거 비밀이에요?” “뭐?”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아주머니가 나를 돌려세워 자신을 마주 보게 한다. 나는 여태까지 아주머니의 눈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아주머니의 눈은 짙은 파란색인데 군데군데 다른 파란색이 섞여 있다. “이 집에 비밀은 없어, 알겠니?” …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알겠어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다. 아주머니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넌 너무 어려서 아직 모를 뿐이야.”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주머니가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서 언제나처럼 모르는 일은 모르는 채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자다가 이불에 실수를 해도,
어려서 잘 못하는 게 있어서 상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수치심이 없었습니다.
소설을 읽다가 에덴동산이 생각났습니다.
소녀가 맡겨진 그 집이야 말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곳이었습니다.
소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속마음을 속시원히 말한 적이 없었어요.
받아들여지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맡겨진 집에서 누려보지 못한,
특별한 사랑을 경험합니다.
부모님 곁이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야속하기만 합니다.
방학이 끝나 집에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만난 엄마와의 대화는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차가 떠나고 나서 엄마가 말한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말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다시 돌아간 집에는 비밀이 넘쳤습니다.
비밀 아래에는 수치심이 고여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어떤가요?
두 가정 중 어느 가정이 더 닮아 있을까요?
얼마 전, 늦은 시간 미용실에 갔습니다.
원장님이 머리를 자르시다가 멈추시더니,
낮에 미용실에 방문한 한 아이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아이는 친구의 아들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학교폭력마저 경험했습니다.
그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아이는 강해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얼굴에 가짜 수염도 붙여보고,
혼자서 이런 저런 노력을 했습니다.
아무리 전전긍긍해도 답을 찾지 못하자,
아이는 결국 방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는 사는게 힘들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고,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그 어디에도 없어서 미용실에 왔다는 겁니다.
원장님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아이 엄마에게 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요?”
쉽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뜸만 들이고 있는데, 원장님이 말을 잇습니다.
“목사님, 상담을 잘 하신다고 들었는데, 이 아이 한 번 만나주시겠어요?”
저는 곧장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만남을 주선해 주신다면, 꼭 만나서 돕고 싶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맡겨진 소녀처럼, 그 아이도 에덴을 경험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부끄럽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공동체를 만나는 것은 기적이자, 선물입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길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김동국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