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의 명암, 그리고 성패는 돈과 명예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목자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가 가져야 할 가장 강력한 신앙고백이 시편 23편에 녹아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양과 목자>라는 책의 저자 필립 켈러는 어린 시절, 목자의 틈새서 자랐습니다.
또, 청년 시절 8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의 목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운영하던 목장 바로 옆에 양들에게 무관심한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풀이 자라도록 땅을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양들을 방치했습니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이웃 양들은 제각기 멋대로 돌아다니며 꼴을 먹으려고 찾았습니다.
방치된 양들은 도둑의 타깃이 되기도 했고, 사나운 짐승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양들은 시야가 좁고 시력이 나쁩니다.
앞을 잘 볼 수가 없고, 어디로 갈지 몰라 그저 헤맬 뿐이었습니다.
이웃 목장의 양들이 그러했습니다.
이웃 양들은 모진 비바람을 맞고 눈보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습니다.
흙탕물만 먹었고 당연히 영양분은 부족했습니다.
다른 목장의 양들과 달리 야위고 쇠약했고, 너무 쉽게 병들었습니다.
필립 켈러의 기억속 그 양들은 항상 배가 고파 보였습니다.
울타리 넘어, 다른 목장의 양들이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을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양들을 바라보며 저자가 깨달은 바가 하나 있습니다.
목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양들의 인생이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마치 BTS의 콘서트처럼,
엄청난 관중이 몰려 들어 예수님을 환호하고 있습니다.
추산된 통계를 보니까,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약 20,000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발걸음, 예수님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치솟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아왔는지 보신게 아니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걱정, 고뇌, 슬픔, 인생의 장애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눈에 그들은 불쌍해 보였습니다.
옷이 해져서가아닙니다.
그들이 단순히 배가 고파서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막6:34/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불쌍히 여기시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파하신다는 말입니다.
왜요? 어디 풀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마냥 헤매고 있어서요.
답이 아닌데 마냥 찾고 있어서요.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그런 우리를 먹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도착하신 곳은 “외딴 곳”이었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거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 아무 것도 알수 없이,
정처 없이 떠돌다가 ‘혹시나 소문으로 듣던 그 분이라면 내 인생이 변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 눈에도 그들은 불쌍했습니다.
왜 불쌍했느냐고요? 35절에 그들이 말해요.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배가 고프다는 거예요.
아무도 찾지 않는 이런 외딴 곳에서,
날이 저물어 캄캄하기만 한 데,
배까지 고프니 보내서 각자 자기만의 풀을 찾아 꼴을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마을에 내려가 각자 음식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게 제자들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그토록 불쌍한 이유는 목자 없는 양 같아서예요.
그들에게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을까요?
바로 그곳에서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하는 한 사람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예수님과 함께한 바로 그곳도 남들이 찾지 않는 외딴 곳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바로 그곳도 때로는 골짜기일 수도 있어요.
다윗이 시편 23편을 고백한 곳도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였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내가 선 그곳이 골짜기인지 아닌지를 봅니다.
어둑어둑한지 밝은 지를 봐요.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내 상황 뒤에 내 목자가 누구인지를 보았습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양은 이끌어 줘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풀을 찾고, 시냇가를 찾을 수 없어요.
목자가 있어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존재가 양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자 없이 홀로 여기저기 찾다 보니, 쓰러질 것처럼 힘겨움을 겪고 있다는 거예요.
혹시 이 자리에, 그렇게 이것저것, 이곳저곳을 찾고 외로이 거닐다,
홀로 지쳐 마음 속에서 손을 내밀고 계신 분들이 계신가요?
그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목자이십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목자이신 건 알지만, 내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정성껏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제자들이 막아섰습니다.
지금은 저녁이고, 이곳은 빈들인데, 지금은 가르칠 때가 아니라 먹일 때가 아니냐는 겁니다.
다윗의 상황도 마찬가지예요.
여호와가 목자이신데, 지금 다윗이 선 곳은 사망이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여호와가 목자시니,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인생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등장하는 겁니다.
<양과 목자>라는 책에 이 대목을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여름이 되면, 고지대로 긴 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 푸른 풀밭이 있고, 방목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지로 향하여 난 길 중, 가장 경사가 완만하고 옆에 계곡이 흘러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이 있어, 길이 나 있는 곳,
바로 거기가 골짜기라고 저자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도 계곡 흐르는 골짜기로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등산하다가 발도 담그고 목도 축일 수 있는 바로 그 길 말입니다.
양들이 그 길을 걸으면서 사망만 보는 게 아니예요,
바로 목도 축이고 풀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지로 올라갔다가 가을이 되면 고지에는 눈이 흩날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골짜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옵니다.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정상으로 올라가기에 가장 좋은 길은
항상 이러한 골짜기를 따라 나 있다.
고지에 익숙한 목자는 누구나 이 점을 알고 있다.
빈 들이라는 공간은 실패의 공간이 아닙니다.
저녁이라는 시간은 망한 시간이 아닙니다.
빈들에서 맞은 저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바로 그 시간 그곳,
왜 예수님이 그때까지 가르치고 계셨을까요?
우리를 이상한 곳으로 이끄신 게 아니라,
바로 외딴 그곳이 고지를 향한 지름길이고,
저녁이 되는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하니까,
골짜기가 슈퍼 블룸, 사방에 꽃이 만개하는 기적의 땅이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조건, 실력이 아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목자이신 그분께 내 작은 것을 드리면 충분했습니다.
한 소년이 드린 작은 도시락, 그것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푸른 풀밭에서 우리를 먹이시고,
쉴만한 물가에서 우리를 마시게 하시는 분입니다.
지난 주간 두드림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다니면서,
큰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베트남에 있는 병원과 학교로 와달라고 초대받고,
오늘도 부산 내 의원, 동장, 구역청 담당자가 오셔서 명함을 주시더라고요.
여기저기 또 오라고요.
작은 우리의 실력이 하나님께 들려지니까,
우리 아이들의 연주를 통해 기적이 일어나더라고요.
청소년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정성껏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렸더니,
하나님은 손에 들린 두드림 오케스트라가 하나님께 귀한 쓰임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선 곳이 빈 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선 시간이 모든 것이 끝난 저녁처럼 여겨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다릅니다.
우리의 오병이어가 그 시간,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에 드려지면,
바로 그곳이 기적의 공간이요,
바로 그 시간이 기적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고요?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시니까요.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시니 우리에겐 모자람이 없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고지를 향해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오병이어를 드릴 때,
그것을 통해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같은 본문으로 설교한 ‘남성교회 수요예배’ 설교 링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