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주에 쓴 칼럼을 참조하여 부활절에 맞춰 새롭게 각색한 칼럼입니다.
1부. 한 청년의 끝, 기독교의 시작이 되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한 청년의 인생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결국, 예수라는 청년은 골고다의 형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를 의미하는 Cross.
이 단어는 라틴어 Crux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를 의미했던 이 단어는 그 당시 욕설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는 말 그대로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총독 빌라도의 힘을 빌어 그 청년을 저주의 나무에 달았습니다.
수많은 군중을 혼란에 빠트렸던 청년 예수를 죽이기만 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청년은 외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마, 청년도 버림 받아 끝이 난 줄 알았던 걸까요?
유대인은 그 외침을 당연시 여겼을 테지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거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한 청년의 죽음.
그 청년의 끝은 기독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2부. 쓰레기의 끝, 악기가 되다!
남미 파라과이에 카테우라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은 매일 1,500톤의 쓰레기가 매립되는 일명 ‘쓰레기 마을’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의 마지막 모습이 쓰레기 아닐까요?
사람이 쓰다가 더이상 가치없다고 여겨질 때, 그 물건을 버립니다. 쓰레기가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쓰레기는 어떤 물건의 끝입니다.
물건만 끝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끝이 있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이상 갈 곳도, 앞날의 미래도 모두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카테우라 마을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마을에 100여 명의 주민이 있습니다.
카테우라 주민들은 버려진 쓰레기처럼, 미래를 버려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로 그 곳에 한 사람이 찾아갑니다.
파비오 차베스입니다.
그는 환경공학자이자, 교회 성가대 지휘자였습니다.
차베스는 카테우라가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바로 그곳이 기적이 시작하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차베스는 쓰레기 마을에 음악 학교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죠.
학교를 시작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또 음악 학교를 하려니, 악기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도 악기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있는 것은 쓰레기입니다.
차베스에게 돈과 악기는 문제되지 않았어요.
그는 쓰레기로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그곳 아이들은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습니다.
쓰레기로 악기를 만든 뒤 쓰레기 악기라도 배우고 싶으면 입학하라고 홍보했지요.
드디어 음악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쓰레기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다가
결국 랜드필 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습니다.
랜드필 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전 세계를 다니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차베스의 제자들은 쓰레기 악기로 연주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쓰레기를 보내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음악을 돌려보냅니다.
3부. 광야, 인생의 끝나는 곳, 그리고 말씀의 시작하는 곳!
성경에서도 카테우라 마을 사람들처럼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등장해요.
민수기 20장 4절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에게 광야는 죽음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치 카테우라 마을 같았죠.
광야를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5절 하반절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배고파도 먹을 게 없습니다.
피곤해도 잘 집이 없습니다.
심지어 뙤약볕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해도 물조차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한톨 희망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모든 게 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끝이라 여기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입니다.
미드바르는 ‘다바르’에서 나온 말입니다.
다바르는 ‘입’, ‘말씀’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광야는 누군가 말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입니다.
광야는 두 귀로 하나님의 꿈을 듣고,
두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장소였습니다.
민수기 20장 6절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혹시, 오늘, 그리고 지금이 광야같다고 여기는 분들 계신가요?
오늘, 지금 여기는 끝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여기는 시작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실 거예요.
앨버트 머메리를 아시나요?
그의 별명은 현대 등반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은 시작된다.
머메리 이전까지만 해도 등산에 대한 개념이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그때까지의 등산은 누군가 닦아놓은 길 만큼만 올라가는 것이었죠.
길이 끝나는 바로 그곳이 등산의 끝이었습니다.
머메리는 등산의 개념 자체를 바꿉니다.
더 이상 길이 없을 그 때 진짜 등산이 시작된다고 했지요.
왜냐고요?
길이 없다는 것은 그제야,
아무도 가보지 못한 새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그 길을 걸을 때,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최정상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끝이 진짜 끝이 아니라고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끝에서 예수님은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나의 끝이라고 여겼던 오늘이 새로운 시작이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 지금, 바로 여기가 새로운 출발선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손을 잡고 바로 거기서 시작할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끝이라고 생각되는 거기가 스타트 라인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나의 끝에서 예수님은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서 우리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당신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김동국 목사 드림

